시간을 벼리다 The Enduring Trace
한 해의 끝에 서면, 시간은 자신이 지나온 자취를 드러낸다.
그 느릿한 숨결 속에서 마주하는 이번 전시는,
24년 동안 구리 동판과 함께해온 윤석희(효천)의 탐미와 숙련이 빚어낸 결실이다.
작가는 수많은 예술적 일탈을 꿈꾸었으나,
결국 동판의 독보적인 매력을 놓지 못했다.
그 마음의 깊은 곳에는 세월이 흐르며 변화하고 익어가는
동판 특유의 색감과 질감에 대한 끝없는 매혹이 자리한다.
그는 전통적인 동판화의 경계를 넘어,
두드리고 밀어내고 부식시키는 물리적 과정을 통해
‘동판 부조(浮彫)와 부식’이라는 자신만의 조형 세계를 이어왔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단순한 이미지 감상을 넘어
금속이 품은 묵직한 존재감과 시간의 깊이가 함께 느껴진다.
윤석희는 밑그림 이후 수정이 불가능한 금필(金筆)을 직접 깍아 만든 도구로
동판을 밀어내며 부조를 형성하고, 때로는 두드리는 과정을 더해 입체감과 결을 쌓아 올린다.
부조 작업을 마친 동판은 유화가리로 전체 부식을 거친 뒤,
연마광택제로 부분적으로 닦아내어 금속의 숨결을 드러낸다.
이후 녹청 부식과 화부식을 필요한 면에 더함으로써
붉고 주황빛이 감도는 구리색에서부터 신비로운 남색·보랏빛까지,
다층적이고 깊이 있는 화면이 완성된다.
그의 작업은 인쇄를 목적으로 한 전통적 동판화와 달리,
한 점 한 점이 독립된 일품일작(一品一作)으로 존재한다.
자연과 역사, 인물 등 다양한 주제를 탐구하며,
인간 존재의 근원적 질문과 삶의 의미, 그리고 종교적 세계를 동판 위에 새겨나간다.
그의 작품에는 전통의 상징과 자연의 숨결, 그리고 삶의 온기가 스며있다.
견고한 금속 위에 새겨진 선과 색은 시간이 빚어낸 자연의 질서이며,
계절의 변화처럼 흐르는 시간의 감성을 서정적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금속의 물성 속에 시간을 새기며, 녹슬고 변색되는 동판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다.
그 변화의 과정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사라지지 않는 의지의 흔적을 선으로 남긴다.
그의 예술은 유한한 삶 속에서 영원을 꿈꾸는 인간의 마음을 비추며,
예술이란 결국 변화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으려는 내면의 형상화임을 보여준다.
“오랜 노동의 고통 속에서도 작업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번 전시는 동판 부조라는 독창적 예술을 통해
시간을 벼리며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을 담담히 드러낸다.
글. 함윤희(마리나갤러리)
호작도, 2025, 동판에 부조 및 부식, 97.8x60.0cm
자개 모란 달항아리, 2025, 동판에 부조 및 부식, 자개 49.5x40.5cm
동백, 2025, 구리 동판에 부조 및 부식, 45.0x33.0cm
봄이 오는 길목에서, 2025, 동판에 부조 및 부식, 33.0x45.0cm
현무(玄武), 2025, 동판에 부조 및 부식, 33.2x49.0cm
연리도Ⅱ, 2024, 동판에 부조 및 부식, 60.0x75.0cm